어제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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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파리의 식당과 공연장에서 동시다발 테러가 일어나고 서울 한복판에서 농민의 몸 위에 물대포가 쏟아지던 날 즈음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무차별 총기난사 테러로 미국이 들끓고 있다. 「어제의 세계」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은 작가의 자서전이지만, 그가 묘사한 이성의 패배와 야만성의 승리는 그저 ‘어제’의 일로만 읽히지 않았다.

지금은 전기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전기와 희곡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작가였던 슈테판 츠바이크는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브라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책은 (사후의 편집 과정에서 덧붙여졌겠지만) “친구 여러분들은 이 길고 어두운 밤뒤에 아침노을이 마침내 떠오르는 것을 보기를 바랍니다!”라고 쓴 그의 유서로 시작한다. 책을 다 읽은 뒤 앞으로 돌아가 유서를 다시 읽어보았다. 어떤 이념에도 속박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사람이 속수무책의 폭력으로 무너져 내리는 세계 앞에서 얼마나 아득한 절망을 느꼈을지 그 깊이를 다 짐작할 길이 없다.

츠바이크는 “역사는 동시대인들에게 그들의 세대를 규정하는 커다란 움직임에 대해 그 첫 단계에서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 논박할 수 없는 철칙”이라고 썼다. 그도 그럴 것이 1차 세계대전 직전의 유럽은 그야말로 ‘황금시대’였고 심지어 당대의 저명한 학자는 세계가 너무 긴밀하게 연결돼 있어 전쟁 같은 건 일어날 수 없다고 예견했다. 하지만 불과 1년 뒤 유럽은 전쟁의 수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은 지 불과 10년 뒤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세계의 풍성함과 상호 연결은 폭력에 대한 안전망이 되지 못한다. 참상의 경험은 다른 비극을 막을 수 없다. 사람들은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하고 역사는 발전하지 않았다. 21세기의 우리는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

큰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츠바이크의 책을 펼친 것은 아니었다. 희망의 단서를 얻으리란 기대도 애초에 없었다. 다만 품위 있고 신중했던 코즈모폴리턴(cosmopolitan)인 츠바이크의 삶, 그가 묘사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며 사람이 어떤 존재이고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 생각할 따름이다. 예컨대 유럽 문화의 융성을 찬양하던 지식인들은 전쟁이 터지자 하루아침에 돌변하여 전쟁을 선동하며 독일 무대에서 셰익스피어를 추방하고 영국 음악당에서 모차르트와 바그너를 추방한다. 이런 광기가 누군가의 선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촉발된 열광’이라는 게 더 충격적이다. 츠바이크 말마따나 “자기들이 하는 일이 일방적으로 옳다는 변함없는 신념”이 사람을 괴물로 만들어 광기와 증오, 망상의 소용돌이 안으로 몰아넣는다.

장황하고 지루한 모든 것을 혐오했던 츠바이크의 작품답게 밀도가 높은 이 책에는 전쟁 전후 세태의 풍속사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당대 문화의 다양한 측면이 담겼다. 위대한 예술가들과의 교류에 대한 묘사도 그들의 박제된 이름에 온기를 불어넣어 피가 돌게 하듯 생생하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어디에 있든 고요함이 그의 주위에서 자라는 듯했던” 사람이었다는데, 그가 전쟁이 터진 뒤 어색한 군복을 입고 나타난 상황을 읽고서는 탄식이 절로 났다. (릴케에게 군복을 입히다니!) 누가 옆에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 조각에 몰입했던 로댕의 ‘무아지경’을 지켜본 뒤 츠바이크는 이렇게 썼다.

“그때 나는 모든 위대한 예술의, 아니 지상의 모든 성취의 영원한 비밀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즉 집중, 모든 힘과 모든 감각의 응집, 그 무아지경, 모든 예술가가 행하는, 자기의 바깥에 있는 것, 세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그것이다. 나는 나의 전 생애를 위한 그 무엇을 배웠던 것이다.”

위대한 시인, 철학자, 음악가의 육필 원고를 열성적으로 수집하고 베토벤의 책상과 저금통, 괴테의 깃털 펜을 갖고 있던 츠바이크. 이 탐미적이며 우아하고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넘치며 국가주의에 단호히 반대했던 세계인인 작가가 스스로 세상을 저버리지 않았더라면 단언컨대 우리가 지금 누리는 문화의 결도 더 풍성해졌을 것이다. 한 세계의 종말에 대한 가장 서글프고 아름다운 헌사라 할 이 책을 읽고 여운이 오래 남는다면 웨스 앤더슨 감독이 츠바이크에게 영감을 받아 만든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같이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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