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최초의 바이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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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내게 CD는 바이닐처럼 표면 잡음이 없기 때문에 훨씬 좋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줬다.

이보게, 우리네 삶 자체가 표면 잡음으로 이루어져 있다네.” – 존 필 (DJ)
p.100

한 가지 주제를 선택해서 그 주제를 깊게 파고드는 계간 「CRAFT」의 이번 호 주제는 ‘레코드’다. 컬렉터들과의 가벼운 이야기부터 레코드와 관련된 장인(Craftsman)들과의 심도 있는 인터뷰, ‘음악 애호가’에서 음반 딜러, 제작가가 된 이들에게 “한국은 주거 불안이 커서 LP를 모으기 쉽지 않다고들 하는데 어떻게 해결하고 계신가요?”란 현실적인 질문을 던지기까지. 레코드에 관한 모든 것이 이 책 한 권에 채워져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모든 걸 짧은 리뷰로 담을 수는 없기에, 책에 대한 리뷰 대신 ‘나의 LP판 구매 경험기’와 레코드 구매를 부추기는 짤막한 글을 적었다. 레코드에 관한 넓고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은 분들에겐 발행 일자와 관계없이 단행본처럼 두고두고 읽을 수 있는 「CRAFT」 가을호를 읽어보는 걸 권하고 싶다.

“레코드는 음원을 기록하는 최초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레코드는 음악을 듣는 가장 불편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p.3

내 ‘최초의 바이닐’은 신촌역 근처 어느 가판대에서 5천 원 주고 산 찰리 브라운 기념 앨범 <Happy Anniversary, Charlie Brown!>이었다. 칙 코리아, 데이빗 베누아, 비비킹 등 여러 유명 뮤지션이 참여한 앨범으로 전면에는 <피너츠>의 선글라스를 쓴 스누피 얼굴이 클로즈업 되어있었고, 뒷면에는 <피너츠> 주인공들의 단체 일러스트가 그려져있었다.

사실 그때 우리 집엔 제대로 돌아가는 턴테이블도 없었다. 그냥 스누피 얼굴 아래 전면에 쓰인 뮤지션들의 이름보단 뒷면의 그림이 좋아서 샀다. 중고라서 끄트머리가 조금 너덜너덜해지긴 했지만 정방형 LP판 커버는 좋은 그림으로 집 안 어딘가에 걸어 두기에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스무 살 그 당시, ‘LP’ 자체를 사는 것보다도 마침 마음에 드는 ‘LP를 사는 경험’을 해보는 게 꽤 그럴듯해 보였다. 이런 허영심을 5천 원에 채울 수 있다는 게 나로선 아까울 게 없는 거래였다.

“커다란 정사각형 커버의 아트워크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레코드는 근사한 액자입니다.” p.3

 

“그래픽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음반은 포스터 디자인과 책 디자인의 사이에 존재하죠. 그런 입체성이 큰 매력이고요.” p.74

나중에 이곳저곳에서, 그리고 이번 「CRAFT」 가을호를 읽어보니 나처럼 커버로 레코드를 고르는 사람들이 적잖다는 걸 알곤 내심 뿌듯했다. 책 표지로 책을 판단하지 말란 말이 있지만, 중고 레코드가 박스째 나와 있는 옛 청계천이나 황학동 시장, 남대문 지하상가 같은 곳에서는 웬만해선 레코드를 들어볼 수 없으니 그저 커버를 보고 ‘감’에 의존해야 한다. 심지어 ‘양평이형’으로 알려진, DJ이자 ‘장기하와 얼굴들’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 중인 하세가와 요헤이는 “커버에 다른 좋은 음반에서 본 얼굴 때문에 사고, 4명이면 밴드니까 사고, 기타 들고 서 있으면 샀다” 하니, 좋은 가격에 LP를 얻어 오려면 일단 커버부터 믿는 수밖에 없다.

“디제이라면 아마 음악이 어떤지 몰라도 커버나 레이블이 수상한 음반부터 살 거예요.” p.34

마지막으로 나와 같은 하수 컬렉터들에게 양평이형이 준 팁이 있다. 중고 LP 시장에서 좋은 음반을 보다 낮은 가격으로 사고 싶으면 “이거 얼마에요?”가 아니라 “여기 얼마에요?”라 묻는 게 좋다고 한다. 그 박스 안에서 어떤 음반이 나오든 같은 가격이니 뜻밖의 명반을 다신 구할 수 없는 가격에 얻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레코드를 사는 이유가 동시대에 활동하고 있는 뮤지션들과 작아진지 한참 된 현재 한국 음반시장에 대한 애정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서울, 경기 곳곳에 있는 레코드 숍 이용을 권하고 싶다. 어디 가서 인정받을 길 없는 개인의 작은 마음이라 한들, 그것이 모이면 분명 문화가 되고 시장이 살아남는 데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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