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 한가운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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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만 보던 그림을 직접 마주할 때의 그 묘한 기분을 좋아한다. 내 눈앞에 있는 이 그림이 분명 다른 시공간이긴 해도 이전엔 작가의 눈앞에 있었고, 그의 손길이 닿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하는 데서 오는 뭉클함. 파리에서는 그림을 볼 때뿐 아니라 거리를 걸을 때도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었는데 (쓰레기도 많고 주차도 아무렇게나 되어 있긴 했지만) 수많은 문인과 화가들이 다녔다는 카페, 서점을 지나친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들떴다. 특히 문화적으로 독창적이고 풍요로웠던 1920년대 파리를 떠올리며 시간을 넘어보는 일은 나처럼 완전한 이방인에게도 낭만적이었다.

“만약 당신에게 충분한 행운이 따라주어서 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다면, 파리는 마치 ‘움직이는 축제’처럼 남은 일생에 당신이 어딜 가든 늘 당신 곁에 머무를 것이다. (If you are lucky enough to have lived in Paris as a young man, then wherever you go for the rest of your life, it stays with you, for Paris is a moveable feast.)”

당시의 파리를 특별하게 만드는 예술가 중 한 명인 헤밍웨이는 이렇게 그 시절을 반추했다. 그리고 죽기 얼마 전, 개인적인 기록 「파리는 날마다 축제(A movable feast)」를 통해 1920년대 파리를 되살려 놓았다. 이 책은 생계에 대한 불안과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동시에 껴안으며 하루하루 글을 써 나가는 미국 젊은이의 파리 체류기이자,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등 지금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예술가들이 파리에 모여 교류했던 시대의 기록이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 이 일이 아닌 다른 일에 대한 동경은 있지만 나는 일단 오늘을 살고 있다. 아니 어쩌면 미래에 대한 불안을 미리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넉넉하진 않았지만 하고 싶은 것 한 가지에 몰입했던 대문호의 햇병아리 시절 이야기를 읽으며 그의 파리를 거닐어본다. 축제의 한가운데에서는 오히려 축제인 줄 모르고, 한바탕 지나고서야 ‘축제였구나’하고 날마다 떠올리게 되는 거라고, 결국 그 기억과 함께 살아가는 거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글쓰기를 일단 멈춘 시점에서부터 그 다음 날 다시 시작하는 시점 사이에는 내가 쓰는 글에 대해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내 작업실에서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내 잠재의식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쓰고 있는 글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었으며, 내가 원하는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 글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그 생각을 지워 버리려고 책을 읽었다. 원칙뿐 아니라 행운도 필요했지만, 그날의 작업을 무사히 마치고 계단을 내려올 때면 나는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아져서 파리의 어디라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산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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