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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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대전당시 독일의 암호 생성기 에니그마는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매일 2200만개의 암호 조합을 만들어 낼 수 있었기에 인간이 당일에 해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은 남들과 다른 방법으로 접근했다. 그는 기계를 이길 수 있는 것은 기계뿐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에니그마를 해독할 수 있는 암호해독기 ‘The Bombe’를 만들어 콜로서스로 발전시켰다. 그가 만든 것은 오늘날의 컴퓨터였다.

현대의 에니그마는 금융시장이다. 수많은 천재들이 놀라운 보상이 뒤따르는 금융시장의 예측에 뛰어 들었다. 그 결과 현대의 금융시장은 인간의 주관적인 판단과 감정을 배제한 금융공학의 최첨단 기술이 상대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머리와 노력으로는 불가능했던 에니그마의 해독을 위해 컴퓨터를 만든 튜링의 접근과 비슷하다.

하지만 이 또한 정답은 아니었다. 우리는 무위험수익보다 높은 수익을 안정적으로 제공해 주던 파생상품의 가격 붕괴로 인해 서브프라임 금융위기도 겪었고, 그 이전에도 적정가격을 이탈하는 시장의 성난 내달림 덕분에 금융공학이 완전한 도구가 아님을 확인했다. 『돈의 물리학』은 현대 경제와 금융이 왜 수학, 물리학과 융합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책이다. 이 책에서는 금융공학의 여러 가지 발전과정을 말해주지만,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를 대하는 태도이다.

모형은 결코 최종적인 답이 아니다. 모형은 완벽하게 성립하는 것도 아니고, 때론 완전히 빗나가기도 하는 가정들에 의존한다. 모형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풍부한 상식과 함께 사용하는 모형이 어떤 것이든 한계가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이렇게 보면 모형은 어느 도구와 똑같다. 대형 해머는 건설 현장에서는 쓸모가 있을지 몰라도, 사진 액자 틀에 못을 박는 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p.361

금융위기를 뼈아프게 겪은 사람들은 월스트리트, 금융시장, 파생상품을 온 세상에서 없애는 것이 금융위기를 다시 겪지 않는 해답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동차 사고를 겪었다고, 온 세상의 자동차를 다 없애자는 말과 같다. 저자는 금융공학의 완벽해 보이는 도구들은 사실 완벽하지 않기에, 언제 실패하고 어떻게 보완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이것은 안정적인 고수익 상품입니다.’라는 은행원의 말만 믿고 잊어버리는 대신, 언제 안정적이지 않은지를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단 뜻이다.

과학은 단순히 지식의 총체가 아니다. 과학은 세계를 배우는 하나의 방법으로, 발견과 검증과 수정이 계속되는 과정이다. p.359

누구는 발전을 계속하고, 누구는 발전을 멈춘다. 금융의 최첨단 기술들도 똑같다. 무언가가 ‘완벽하다’라고 철썩 같이 믿는 순간, 발전이 멈추고 위기에 노출된다. 계속 발전하기 위해선 완벽해 보이는 자기 자신이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실패하기 전에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가야 한다. 애플은 새로운 제품을 내놓을 때 이미 잘 팔리고 있는 자사의 기존 제품이 잠식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는 고통스럽지만 생존의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먹지 못한다면, 남들이 나를 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파괴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나를 파괴할 것이다.
– 피터 디아만디스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어쩌면, ‘누군가 신과 싸우기 위해 신을 만들고 있다면, 우리가 지금 싸우는 상대가 신이 아닐까를 고민해야 한다’일지도 모르겠다. 금융 시장은 운에 기대어 뛰어들었다가 전 재산을 날리고 젖은 나비처럼 돌아가는 곳이다. 해독해야 할 것은 에니그마인데 십자 낱말 맞추기 노력만 기울이고 있지는 않은지를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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