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옷을 입고 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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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know you know I know you know I know.”
“내가 알고 있다는 걸 네가 알고, 그 사실을 또 내가 안다는 걸 네가 알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 톰 건(Thom Gunn)의 시 『육욕의 지식(Carnal Knowledge)』 중

007 시리즈 24번째 작품 개봉을 앞두고 스파이를 특집으로 잡은 『미스테리아 3호』는, 첩보물 애호가로서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물론 스파이 특집과 별개로 이 책은 ‘미스터리물’ 격월간 문예지이기에 전체 내용이 ‘스파이’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스파이에 대한 칼럼 / 추천 소설 및 이를 재구성한 이야기 / 인터뷰 등이 절반 정도, 나머지 절반은 세 편의 추리소설이 실려있다.

‘스파이’란 키워드를 소개하며, 대체 왜 영국에서 유독 스파이 소설이 많이 나왔는지를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칼럼에서는 대영 제국 시절 발달해 온 지리학과 인류학부터, 산업혁명의 발상지였던 영국 내 ‘정보 싸움’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조목조목 이유를 분석한다. 일단 스파이는 기본적으로 박학다식하면서, 상황에 따라 그에 적절한 지식을 뽑아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누설되어선 안 되는 정보를 지키는 일이 중요한데, 근대에 와서 스파이 역할의 구실을 만들어 준 게 바로 발명 기술이라는 것. 이런 면에서 아무래도 스파이 양산(?)을 위한 지식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고, 스파이의 활동 및 업무의 목적과 구실이 존재할만한 곳으로 영국만큼 적절한 나라는 또 없었을지도 모른다.

“뚜렷한 목적을 갖고 자기 정체성을 바꾸거나 숨기면서 남을 조종하는 사람이 나온다. 그게 간첩 아닌가.” – 20p

스파이, 즉 간첩에게 필요한 건 뛰어난 머리와 사명감뿐만이 아니다. 뛰어난 연기력도 필수다. 위에서 인용한 칼럼 『해가 지지 않는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의 필자 성현석 기자는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도 결국은 간첩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지며 칼럼의 운을 띄운다.

국가정보원의 기준에 따르면, 스파이는 신분을 완전히 숨긴 ‘블랙’과 ‘국정원 직원’임을 밝히고 기관에 출입하는 ‘화이트’, 이 사이에 다른 직업을 갖고 활동하는 ‘그레이’ 세 종류로 구분된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아마 ‘라이트 그레이’ 정도의 첩보 활동을 하면서 일상을 살고 있을 거다. 삶의 일부분을 완벽하게 숨겨야 하는 건 아니지만, 어디에서든 마음 놓고 풀어 놓을 수는 없는 어른으로서의 삶은, 칼럼의 결론처럼 간첩 활동의 씁쓸한 이면까지도 닮아있다.

“(중략) 사람값은 너무 싸고 현금은 너무 부족한 도시 아니겠습니까.” – 178p

마지막으로 스파이 특집과 함께 수록된 소설 중 두 번째 글인, 『쓰레기를 비싼 값에 사다』를 짤막하게 소개하며 『미스테리아 3호』에 대한 소개를 마치고자 한다. 이 소설은 해방 직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시대 상황이나 허를 찌르는 몇몇 대사를 보면, 2015년 현재를 배경이라 해도 어색할 게 없다. 그리고 위에 인용한 글처럼 ‘사람값은 너무 싸고 현금은 너무 부족한 도시’에서 밝은 회색 옷을 입고 사는 사회인들의 첩보 활동은 영화처럼 폼나기 보단 생활형 간첩처럼 불안해 보인다. 부쩍 추워진 요즘, 모두가 선의에 기반한- 각자의 생활첩보작전을 수월히 해나가며 모쪼록 별일 없이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 위 리뷰는 스포일러를 막기 위해 축약한 부분이 많습니다. 이 글을 읽고, 책의 내용이 궁금해지신 분들은 꼭 직접 사서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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