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 속에서만 들리는 것

14_정본-백석-시집

김애란의 단편 『호텔 니약 따』에서 은지와 서윤, 두 여대생은 ‘아무 것도 되지 않은 채,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이 이상이 될 수 없을 거라는 불안을 안고(251p.)’ 훌쩍 여행을 떠난다. 여행이 길어지면서 서로에 대한 염오가 솟구칠 무렵, 그녀들은 죽은 이들 중 자기가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있다는 캄보디아의 호텔 ‘니약 따’에 묵는다. 서윤은 침대에 누워 중얼거린다.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좁고 어두운 공간에 갇힌 한 남자의 읊조림, 백석의 시다.

두 여대생이 우정의 균열을 예감하며 중얼댔던 막막함에 반해, 내게 백석의 시는 마음이 혼탁한 날이면 어김없이 찾는 책이다. 처량하지 않지만 겹겹이 애잔하고, 쓸쓸하다고 굳이 드러내지 않는데도 기어이 마음 한구석을 울리고 만다. 생각처럼 되어 가지 않는 답답한 세상사를 탄식하기를 그치고, 시인의 시선은 물(物)에 깊이 머문다. 빚을 얻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맑고 가난한 친구인 가무래기(모시조개)가 하나 있다고, 같이 이 못된 놈의 세상을 크게 크게 욕할 것이라고도 하고(「가무래기의 낙」), 차가운 날 처마 끝에 꽁꽁 얼어 있는 명태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 문턱에 꽁꽁 얼어서 /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명태」)’ 라고 독백한다. 여인숙 방구석 목침을 가만히 베어보면서, ‘이 山골에 들어와서 이 木枕들에 새깜아니때를 올리고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 그사람들의 얼골과 生業과 마음들을 생각해본다’ 라고 적은 시(「山宿」)에서는 그럼에도 떨칠 수 없는 아득한 그리움이 느껴진다. 

“밖에서는 어데서 물새가 우는데
토방에선 햇콩두부가 고요히 숨이들어갔다”

―「秋夜一景」

“별많은밤
하누바람이불어서
푸른감이떨어진다 개가즞는다”

―「靑柿」

외로움 속에서만 들리는 것들이 있으며, 지쳐서 바닥을 친 마음이 그제야 응시할 수 있는 것들이 있음을 백석의 시는 조용히 보여준다. 앞서 언급한 『호텔 니약 따』, 삐걱이는 관계의 여행에 반전이란 없었고 서윤과 은지는 앞으로 이 여행을 어떻게 이어 나가야 할지 황망해하며 소설은 끝난다.

그러나 이 소설이 정말로 가슴을 아리게 하는 순간은 여행이 주는 이국의 빛이 아니라 아무도 안 만나고 싶다던 서윤이 꿈에서 죽은 할머니를 만날 때다. 서윤은 할머니의 교통사고 보험금으로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를 댔으며 마지막 남은 500만원으로 이 여행을 왔다. 죽어서도 자신을 위해 폐지를 줍고 있는 할머니를 보며 서윤은 엉엉 소리 내어 운다. 아마 여행이 끝나면 서윤은 할머니를 잊고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좁고 어두운 공간에 갇혀서 자기가 누워 있는 초라한 장소의 주소를 반복해 본 한 남자, 백석의 마음이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읽혀졌으려나. 나 역시 백석의 마음을 읽고 싶어서, 오래도록 울고 갓 세수를 한 맑은 얼굴 같은 그의 시들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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